샤넬은 어떻게 명품이 되었나
샤넬 Chanel
샤넬(Chanel)은 세계 탑티어 명품 브랜드입니다. 샤넬 매출은 2021년 156억달러, 한화로 약 22조 6,000억원($1=1,449원 기준)입니다. 샤넬 역사는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이 1910년 프랑스 파리에 샤넬 모드(Chanel mode)라는 모자 숍을 열면서 시작됩니다.
모자를 파는 상점으로 시작된 샤넬은 어떻게 명품 패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요? 갸날픈 몸매의 여성 가브리엘 샤넬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세계 패션을 선도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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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 로고 |
가브리엘 샤넬 출생과 성장
가브리엘 샤넬은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남서부 소뮈르(Saumur)에 있는 어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자선 병원 세탁부였고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직물이나 여성용 속옷을 파는 노점상이었습니다. 사실 샤넬은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시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었으며 훗날 회상할 때도 그때그때 다르게 묘사했습니다.
샤넬 나이 12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사후 아버지는 아이들을 친척이나 고아원에 맡겼습니다. 샤넬은 오바진(Aubazine)이라는 수도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이후 샤넬은 두번다시 아버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샤넬은 이 수도원에서 거의 7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 기간동안 샤넬은 종교시설과 종교인들이 입는 의복의 순수함과 단순함, 그리고 흑백의 조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코코 샤넬" 탄생
수도원이 운영하는 고아원을 나온 샤넬은 프랑스 중부 뮬랭(Moulins)으로 가서 여학교에 들어습니다. 그 학교에는 아버지의 여동생이 이미 다니고 있었는데 샤넬보다 1살 많았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친하게 지내며 사업을 함께 하게 됩니다. 샤넬은 이 학교에서 재봉일을 배웠습니다. 돈이 없었던 샤넬은 학비를 면제받고 겨우 학교에 다녔습니다.
샤넬은 이후 재봉사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캬바레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샤넬은 이 캬바레에서 코코(Coco)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그 이유로는 그녀가 "Qui Qu’a Vu Coco"(누가 코코를 보았나?)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cocotte(행실나쁜 여자, 암탉, 귀여운 여자)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가브리엘 샤넬은 이때부터 가브리엘 '코코' 샤넬로 불리게 됩니다.
재봉사로 일하는 동안 샤넬은 오랜 세월 여성을 옥좨어 온 코르셋과 길게 늘어지는 무거운 옷에 변화가 없는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얻은 영감과 재봉사로 일하면서 가지게 된 의문은 훗날 패션 혁명을 일으키는 기반이 됩니다.
샤넬 하우스 탄생
1906년 샤넬은 대부호의 상속인이었던 에티엔 발산(Etienne Balsan)을 만납니다. 그리고 프랑스 북부에 있는 그의 대저택으로 들어갔습니다. 에티엔 발산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 샤넬은 여유를 가지고 패션에 디자인에 몰두하게 됩니다. 샤넬이 처음 만든 것은 모자였습니다. 당시 에티엔은 자주 사회 저명인사를 불러 파티를 즐겼는데 샤넬이 디자인한 새로운 스타일의 모자는 파티 참가자들애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1908년 샤넬은 일생동안 유일하게 사랑을 느꼈던 아서 보이 카펠(Arthur “Boy” Capel)을 만납니다. 그리고 에티엔 발산의 친구였던 카펠과 함께 파리로 향합니다. 카펠의 도움으로 파리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숍을 오픈합니다. 명품 브랜드 샤넬의 첫 출발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샤넬이 디자인한 모자에 열광했습니다. 특히 유명 여배우들이 샤넬 모자를 즐겨 사용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샤넬은 프랑스 휴양지 듀빌에서 여성복 패션 디자이너로서 새 장을 엽니다. 휴양지에 온 여성들이 몸을 죄는 코르셋과 화려한 복장을 고수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캐쥬얼하고 간편한 옷을 디자인합니다. 여성들이 코르셋에서 해방되어 편안한 복장으로 세상을 활보할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샤넬은 1913년 남자친구 카펠의 격려와 지원에 힘입어 휴양지인 듀빌에 두번째 숍인 가브리엘 샤넬(Gabriell Chanel)을 오픈합니다. 이곳에서는 모자와 여성용 캐쥬얼복, 운동복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샤넬이 만든 여성복 디자인은 남성 옷처럼 입기 편하면서도 패셔너블했습니다. 샤넬은 여성도 남성처럼 활발한 활동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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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이 비아리츠에 오픈했던 매장 |
샤넬은 1915년 프랑스 비아리츠(Biarritz)에 기성복 매장을 열었습니다. 이 매장은 샤넬의 첫번째 쿠튀르 콜렉션(couture collection: 전문 디자이너가 주문하고 옷을 만드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샤넬 하우스에서 일하는 사람만 3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샤넬은 사업이 성공을 거두면서 카펠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았습니다. 그리고 1918년, 첫번째 숍인 모자가게를 연 후 채 10년이 되지 않아 파리 캉봉(31 Rue Cambon)에 4번째 매장을 열었습니다. 이 매장을 열면서 매장이 있는 빌딩 전체를 구입하고 빌딩 꼭대기에 샤넬 깃발을 걸었습니다.
샤넬 넘버5 향수
101년 전에 선보인 후 아직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향수. 샤넬 넘버5 향수는 1921년 5월5월 출시되었습니다. 이 향수는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가 개발했습니다. 5번째 샘플이라서 넘버5라는 이름이 붙었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샤넬은 숫자5를 아주 좋아했는데 이 때문에 5번째 샘플을 골랐고 넘버5 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 향수는 매장을 찾는 아주 특별한 고객에게만 판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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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 넘버5 |
숫자가 들어간 향수 이름과 심플한 모양의 향수 용기는 시대를 앞서가는 샤넬의 감각을 잘 보여줍니다.
샤넬 넘버5는 1952년 당시 전성기의 마를린 먼로가 "몇방울의 샤넬 넘버5만 입고 침대로 간다"라고 밝혀 큰 화제를 모았고 향수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샤넬 넘버5를 시작으로 두번째 향수인 샤넬 넘버22를 비롯 샤넬 화장품도 1924년 처음 출시했습니다.
샤넬 로고 제작
두개의 C가 서로 맞물린 샤넬 로고는 1925년 처음 선보였습니다. 샤넬은 자신이 직접 이 로고를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두개의 C는 그녀의 닉네임 코코과 샤넬(Coco Chanel), 또는 샤넬과 그녀의 사랑이었던 카펠의 첫글자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샤넬이 로고를 제작하기 전 샤넬 로고와 비슷한 문양은 여러곳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샤넬이 한때 살았던 수녀원 유리창이나 샤넬이 방문하곤 했던 프랑스 니스에 있는 대저택 크레마트에도 C가 겹쳐진 문양이 있습니다.
리틀 블랙 드레스 Little Black Dress
샤넬은 1926년 기존 여성복 개념을 바꾼 리틀 블랙 드레스를 선보입니다. 1920년 이전까지 검은색 옷은 여성들이 장례식에서 입는 옷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샤넬이 리틀 블랙 드레스를 선보인 때는 대공황시대로 많은 여성들이 옷을 살 돈을 마련하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런데 샤넬은 비용도 적게 들고 간편한 블랙 드레스를 선보여 많은 여성들이 부담없이 옷을 사 입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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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이 디자인한 리틀 블랙 드레스 |
장식을 최소화한 이 옷은 가격이 싸서 부담이 없었고 간편하면서도 입기 편했습니다. 당시 패션잡지 보그(Vogue)는 샤넬이 디자인한 리틀 블랙 드레스를 두고 "샤넬 포드 드레스"라고 소개했습니다.
코르셋을 입으며 허리를 쪼이고 발 아래까지 늘어지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야 했던 당시 여성들은 리틀 블랙 드레스는 혁명적인 옷으로 반겼습니다.
헐리우드 진출
헐리우드 개척자였던 영화제작자 사뮤엘 골드윈(Samuel Goldwyn)은 헐리우드에 프랑스 패션을 접목시키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골드윈은 샤넬과 1백만불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계약에 따라 샤넬은 일년에 2번 헐리우드를 방문하여 영화배우를 위한 옷을 제작하고 골드윈이 소유한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패션을 담당했습니다. 이 때가 샤넬이 47세였던 1931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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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이 헐리우드에서 디자인한 옷 |
샤넬은 골드윈이 제작한 영화 "오늘밤이 아니면 절대"(Tonight or Never),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언어가 있었다"(The Greeks Had a Word for Them)의 의상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좋지 않자 샤넬은 헐리우드를 떠났고 다시는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프랑스 영화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샤넬 2.55 백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기간 중에도 샤넬은 장신구와 향수를 판매하는 숍을 운영했습니다. 나찌가 프랑스를 점령한 후 샤넬은 자기보다 13살 어린 프랑스 주재 나찌 외교관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나찌 스파이로 의심받기도 했습니다. 샤넬은 기소를 피하기 위해 스위스로 도피했습니다.
약 10년 동안의 스위스 도피생활 후 샤넬은 71세의 나이에 패션계로 복귀했습니다. 자신의 복귀 조건으로 회사 지분은 모두 사업 파트너였던 피에르 웨르디메( Pierre Wertheimer)에게 넘겼지만 다시한번 혁명적인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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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 2.55 핸드백 |
컴백 후 샤넬이 선보인 것 중 하나는 샤넬 2.55 여성용 백이었습니다. 샤넬 특유의 네모형 잠금장치를 갖춘 가죽 소재 핸드백에 긴 금색의 체인을 달아 어깨에 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패션계에서는 여성들의 손에 자유를 부여한 역사적인 순간으로 평하하고 있습니다. 이 가방이 나오기 전 여성들은 핸드백을 손으로 들고 다니거나 팔에 끼우고 다녔습니다.
샤넬 2.55 백은 1955년 2월 처음 출시된 데서 따온 이름입니다.
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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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넬 무덤에 있는 비석 |
샤넬은 죽기 전 자신을 스위스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에 놓일 비석을 자신이 직접 디자인했습니다. 샤넬 무덤에 있는 비석에는 다섯마리(자신이 가장 좋아한 숫자 5)의 사자 머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샤넬은 1971년 1월 프랑스 파리 리츠(Ritz)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 나이 87세였습니다. 샤넬은 스위스 로잔에 있는 Bois-de-Vaux Cemetery에 잠들어 있습니다.






